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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장 14절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문장은 단순한 성탄의 선언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종교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선언이다. 기독교는 사상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윤리 체계나 도덕 교훈으로 출발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1. 말씀은 설명이 아니라 ‘현현’이다.
‘말씀(Logos)’은 원래 설명하고, 해석하고, 이해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육신은 단지 몸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배고픔과 피곤함, 오해와 거절, 눈물과 아픔을 포함한 인간의 전 존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상을 설명해 주는 책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빌려’ 오신 분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통과하신’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개념이기 전에 삶으로 마주하는 인격이다.
2. “거하시매” — 잠시 방문이 아니라 거처를 정하심.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한다. 이 ‘거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장막을 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잠깐 방문한 손님이 아니시다. 문제 많은 인생을 둘러보고 떠난 관찰자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현실 한복판에 거처를 정하셨다. 불완전한 가정, 흔들리는 관계, 불안한 생계, 기도가 막히는 밤, 믿음이 흔들리는 계절 속에 하나님은 자리를 잡으셨다. 이것이 성탄의 깊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통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3. 성탄은 ‘해결’이 아니라 ‘동행’의 시작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즉각적인 해결을 기대한다. 문제가 사라지고, 상황이 정리되고, 눈물이 멈추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탄은 문제의 즉각적 제거보다 임재의 확증을 먼저 보여준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가 있는 그 자리에 내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멀리서 동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안에서 이해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왜 아직도 힘드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를 묻는다.
4. 오늘,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말씀이 설교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가 되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말씀이 실제 관계 회복으로 나타나고, 사랑에 대한 말씀이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으로 드러나며, 소망에 대한 말씀이 포기하지 않는 하루로 이어지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을 설명으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 보게 된다.
맺으며. 성탄은 한 날의 기념이 아니라 한 방식의 신앙을 요청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듯, 우리의 믿음도 삶이 되어야 한다. 말로는 맞고, 생각으로는 동의하지만 삶으로는 아직 머뭇거리고 있다면, 성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설명보다 동행을, 정답보다 임재를, 말보다 삶을 선택하신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도 유효하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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